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자겸의 난 (문단 편집) === [[연경궁]] 사변 === 인종이 패배한 이유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공인 척준경을 자극한 데에 있었으며 적어도 인종은 그렇게 생각했다. 인종은 몰래 자신의 [[주치의]]였던 최사전을 척준경에게 보내 살살 달랬는데 척준경이 조금씩 마음을 바꾸자 인종은 조칙을 내리며 척준경을 포섭하기 위한 [[밑밥]]을 깐다. >"생각건대 짐이 밝지 못하여 흉도가 일을 터뜨리게 하였다. 대신이 걱정하고 힘들게 했으니 모두 과인의 죄다. >이를 이용해 몸을 굽혀 잘못을 후회하고 하늘을 향해 마음을 다잡아 신민과 함께 새로운 덕을 만들고자 한다. >경은 스스로를 다잡는데 노력하고 '''옛 일을 염두에 두지 않고''' 모든 힘을 다해 보조하여 후환이 없도록 하자." >---- >인종, 척준경에게 하사한 조서. 고려사 이자겸 열전 대놓고 모든게 내 탓이니 서로 옛 감정을 버리고 같이 정권을 회복하자고 유도하고 있는데 인종은 이자겸파보다는 척준경이 더 믿을 만하다고 생각한 듯하다. 이는 이자겸의 아들 이지언의 노비와 척준경의 노비끼리 싸우며 나온 발언이 불을 붙였다. >"네 주인이 궁궐에 화살을 쏘고 불태우니 이는 죽음으로 갚을 죄다. 너도 노비가 될 꼴인데 어찌 날 모욕하는가!" 이 다툼을 전해들은 척준경은 대노하여 바로 중흥택으로 뛰어갔으며 옷과 관을 벗어 던진 뒤 외쳤다. >"내 죄가 크다, 마땅히 관청으로 하여금 판결을 내리게 하라!" >---- >고려사 이자겸 열전. 그리고 뒤도 안 돌아보고 나가버리니 사람들이 말렸다. 그러자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 밖으로 나오지 않았는데 이자겸은 아들 이지미와 이공의를 보내 화해를 구했지만 척준경은 도리어 그들에게 질타한다. >"'''전일의 난은 모두 너희 등이 한 짓이다. 왜 내 죄만 죽어 마땅하다 하는가?'''" 그리고는 그들을 만나보지 않았다. 냅다 또 [[선언]]하니 >"내 고향으로 돌아가 늙을 것이다!" 척준경의 성질이 급하다는 것이 보이는데 그야말로 극단적인 말만 골라서 하고 있다. 하지만 솔직히 척준경이 정말 자신의 권력을 버리고 귀향해 버릴까? 당연히 아닐 것이다. 확실한건 이자겸과 척준경이 난 이후에 사이가 매우 틀어졌다는 것이다. 서로에게 난의 잘못을 돌리고 있는걸 보면 그들이 난의 [[후폭풍]]을 감당하기 버거워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이자겸의 권세가 2달 밖에 유지되지 못한 듯하다. 인종은 이를 듣고 또 척준경에게 [[시그널]]을 보내며 자신의 [[명마]] 1필을 선물하는데 노비 분쟁 사건 이후 이자겸은 대충 누가 뭘 하려는지 알아차린 듯하다. 인종 4년(1126년) 4월 이자겸은 인종을 데리고 [[안화사]]에 간다. '정국안화사(靖國安和寺)'는 원래 [[태조(고려)|태조]]이 창건한 사찰로 훗날 [[예종(고려)|예종]]이 크게 증축했다. 예종은 안화사를 [[문경태후]]의 원찰로 바꾸었는데 이자겸이 인종을 데리고 [[천수사]], [[봉은사]][* 효사관이라는 태조진전이 있었다.], [[신흥사]][* 공신당이 있어 [[공신]]의 [[초상화]]가 벽에 걸려 있었다.], [[현화사]]도 아닌 안화사에 데리고 간 것은 그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이었다. 절에 가던 도중 인종은 타버린 옛 본궐을 보고 눈물을 흘렸으며 안화사에 도착한 뒤 안화사의 승려와 일꾼들은 인종에게 절을 올렸는데 이자겸은 말 위에서 이것을 바라보았다. 인종 4년(1126년) 5월 1일 인종을 견제할 필요성을 느낀 이자겸은 연경궁으로 인종의 처소를 바꾼다. 그는 자신의 관저였던 의친궁 숭덕부를 연경궁 남쪽으로 옮겼고 의친궁 북쪽에 있는 연경궁 남쪽 성벽을 부숴 길을 바로 통하게 만들었다. 또한 자신의 사병을 국가의 무기고에서 꺼낸 무기로 무장시켜 늘 데리고 다니니 인종은 어이가 없어 혼자 북쪽 뒤뜰에서 하늘을 바라보고 오랫동안 운 적도 있었다. 인종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다방면으로 이자겸을 감시하며 척준경을 끌어당겼다. 결국 척준경은 이자겸을 [[배신]]하고 인종에게 붙는데 척준경의 [[충성]] 문서를 본 인종은 답한다. >"국공(國公)은 비록 참적이나, 반역의 시도는 아직 드러나지 않았다. 짐이 먼저 손을 쓰면 먼저 친족을 해치게 되는 꼴이니 나중의 변란을 기다리는 것도 늦지 않다." >---- >인종, 척준경에게. 고려사 이자겸 열전. 인종은 늘 자기 휘하의 중관을 시켜 이자겸을 몰래 관찰하고 있었다. 인종 4년(1126년) 5월 20일 인종은 이자겸의 이상 행동을 포착했고 인종의 중관이 인종이 직접 쓴 쪽지를 장교들과 회의 중이던 척준경에게 전달했는데 이 쪽지에는 척준경도 망설이게 한 내용이 적혀 있었다. >"오늘 숭덕부군(崇德府軍)이 병(兵)을 끌고와 전각의 북쪽에서 침전의 문을 부수려 한다. 짐이 만약 피해를 입는다면 내 덕이 모자라서 그런 것이다. >단지 내가 아파하는 것은 태조가 업을 세우고 열성(列聖)께서 서로 이어왔는데, 과인의 때에 이르러 이성(異姓)이 갈아버리려 하는 것이다. >이는 오로지 짐의 죄뿐만 아니라 보상대신(輔相大臣)[* 왕을 보좌한 재상과 대신들.]들도 심히 부끄러워 할 일인 것이다. 부디 경은 잘 생각해보길 바란다." >---- >인종, 마지막 결전을 앞두고. 고려사 이자겸 열전. 척준경은 이를 보고 바로 결정을 내리지 못했는데 이제 '고려국왕'과 '조선국공' 중 한 쪽을 고르면 절대 되돌릴 수는 없다. 척준경은 자신의 부하 김향에게 묻는데 김향은 울면서 무릎을 꿇고 임금을 도와야 한다고 호소했다. 마음을 잡은 척준경은 즉각 움직였는데 휘하 장교 7명과 20여 명의 장정을 이끌고 바로 자신이 불질렀던 본궐로 향했으며 황성의 정문인 광화문(廣化門)[* 황성(皇城)의 동대문. 경복궁 광화문과는 발음이 비슷하나 한자 표기와 용도가 다르다.]에 도착한 척준경은 왕당파 중관과 이공수가 몰래 쪽문을 열어 주어 잽싸게 들어갔다. 본궐 무기고에 먼저 도착한 척준경의 부하는 100명의 군사를 뽑고 그들을 무장시켰으며 그렇게 무장을 마친 척준경은 곧장 연경궁으로 갔다. 가던 중 이자겸파 신하 1명을 만났는데 그가 척준경의 군세를 보고 불손한 말을 하자 즉시 죽였으며 척준경이 군대를 끌고 연경궁의 천성전문(天成殿門)에 도착하자 미리 나와있던 인종이 그를 반겼다. 숭덕부군이 인종과 척준경을 향해 화살을 쐈지만 척준경이 으르렁거리며 칼을 휘두르자 기세가 밀렸으며 척준경은 인종을 데리고 본궐 무기고로 향했고 호위를 강화했다. 척준경이 부하를 시켜 이자겸을 부르자 이자겸은 이미 모든게 끝났음을 직감했는지 소복을 입은 채로 왔다고 한다. 척준경은 이자겸을 팔관보(八觀寶)[* 고려시대 [[팔관회]] 개설을 담당한 부서.]에 가두었고 그의 처자식을 모두 찾아 역시 팔관보에 가두었다. 척준경은 본보기로 이자겸을 호위하던 장교 2~3명을 죽였고 군졸을 체포했는데 드디어 복수에 성공한 인종은 광화문에서 선언했다. >'''"재앙이 궁궐에서 일어나 대역죄인이 부도하니, 충신과 의사들 덕분에 의로움을 들어 해악을 없앴도다!"''' >“禍起蕭墻 大逆不道, 賴忠臣義士 擧義除害.” >---- >인종, 드디어 정권을 회복하고. 고려사 이자겸 열전. 그제서야 해동천자가 귀환했다는걸 알게 된 개경의 시민들은 만세를 외치고 박수를 치며 눈물을 흘렸다. 장남 이지미는 뒤늦게 변고가 생겼다는걸 듣고 휘하 장정 100명을 끌고 광화문에 가려 했지만 폐쇄된 문은 열리지 않았고 그들은 결국 병부(兵部) 청사에 주둔했다. 당시 이지미는 이자겸이 잡힌줄 모르고 있었는데 병부의 군대와 척준경의 군대가 와서 그들을 모두 잡아갔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